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스 큉 (문단 편집) == 활동 == [[교황청]] 소속 그레고리오 대학을 졸업했고 [[성품성사|사제서품]]을 받은 후 [[프랑스]] 소르본 대학에서 [[박사]]학위를 취득했다. 한스 큉의 박사 논문 주제는 [[이신칭의|의화론]]으로 개신교 [[신정통주의]] 신학자 [[칼 바르트]]의 신학과 가톨릭의 의화론이 충돌하지 않고 같은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는 연구[* 바르트 역시 큉의 연구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. [[http://www.cpbc.co.kr/CMS/newspaper/view_body.php?cid=471941&path=201309]]]였다. 칼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의 뿌리를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에 두었기 때문에[* 바르트는 자신이 직접 배운 스승들 당시 자유주의 신학과 완전히 학연 단절을 선언했다. 그 대신 루터와 칼뱅 같은 종교개혁 1세대 신학자들이 연구로 돌아섰고, 루터의 로마서 강의는 바르트의 명작으로 꼽히는 (1920년 발표한) 로마서 연구로 이어졌다.] 필연적으로 [[교회일치운동]]을 지향했다. 훗날의 교황 [[베네딕토 16세]]가 된 요제프 라칭거의 절친으로 둘은 [[제2차 바티칸 공의회]]에 신학적 연구를 제공했으나, 나중에 라칭거 신부가 정통 교리 수호와 연구에 집중함에 따라 관계가 소원해졌고, 큉이 『무류성에 대한 의문』{{{-2 (''Unfehlbar? Eine Anfrage'')}}}을[* 이 제목은 『무류성? 하나의 질문』으로 직역할 수도 있다. 영어 제목은 『Infallible? An Enquiry』이다.] 출판한 이후[* '교황 비판했다가 제재 당했다'라고 단순화시키는 경우도 많지만, 해당 저서는 '교황의' 무류성만 거부하는 게 아니라 '인간의 언어로 된 모든 명제'의 무류성을 거부하는 책이다.] 교수권을 박탈당하기도 하였다. 이는 [[요한 바오로 2세]] 시기 당시의 신앙교리성 장관이 건의한 바였는데, 그 장관이 다름 아닌 요제프 라칭거였다. 이 사건 후 가톨릭 대학에서 신학을 강의할 자격을 박탈당했다. 그러나 독일 튀빙겐 대학에서는 큉 교수와 논의 끝에 [[에큐메니컬]] 신학부를 신설하였다. 가톨릭 교계에서도 교수 자격만 박탈하고 [[사제(성직자)|사제]]직은 박탈([[파문]])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했다. 큉 스스로는 20세기판 종교 재판을 당했다며 매우 아쉬워한다. 그는 바티칸의 교수직 박탈 조치가 시대 착오적인 [[교황무류성]] 교의에 대한 비판에 재갈을 물리려는 조치라며 [[제2차 바티칸 공의회]] 이후 전세계 신학자 수백 명 이상이 교황무류성 교의를 비판했지만 교회의 압력으로 입을 다물었고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은 자신을 포함해 한두 명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